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의 전쟁범죄 (문단 편집) == [[식인]] == > 우리는 300마일 덜어진 곳에 끌려가 하루 12시간 작업을 했죠. 먹을 게 거의 없었어요. 포로들은 풀과 나뭇잎을 먹었는데 뱀, 개구리, 그리고 다른 곤충들까지 먹었어요. 여기서 일본군은 '''매일 포로 1명을 잡아먹었어요.''' 약 100명의 포로가 일본군에게 잡아먹혔어요. 나머지는 50마일 떨어진 곳에서 10명이 병으로 죽었는데, 일본군은 또 포로를 고르기 시작했어요. 선택된 포로는 오두막으로 데려가서 산채로 살을 잘라내고는 그대로 도랑에 버렸어요. '''선택된 포로에게서 살이 잘려 나갈 때, 버려진 뒤 도랑에서 고통에 못 이겨 내지르는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려 왔어요. 울음소리는 점점 희미해졌어요.''' >----- >― 1942년 2/15 [[파키스탄]] 군인 하탐 알리-43년 뉴기니 마노콰리 비행장 건설에 투입.[* 알리도 오두막으로 끌려갔지만 도망쳤고 그는 15일간 정글을 돌아다니다 [[호주군]]에게 구조되었다.] >'''"[[연합군]]의 인육을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, 아군의 인육을 먹는 놈은 엄중히 처벌한다."''' >----- >― '''1944년 12월. 제 18군 사령부''' (1946년 12월 11일 [[도쿄 재판]] 기록) 식량 부족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행위는 극한 상황에 몰린 [[군대]]에서 아주 흔하며, 일본군의 [[식인]] 행위의 원인 또한 식량 부족이 때문에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. 실제로 일본군 보급 문제를 보면 알겠지만 보급이 굉장히 어려워졌고, 이로 인해 식인 행위가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. [[밀리환초 학살사건]]이 대표적인 사례이다.[* 이때는 어처구니없게도 일본 육군과 해군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.] 다만 너무도 임팩트가 엄청난 한 식인 사건 때문에 이러한 보급 문제가 있다는 점은 거의 잊혀지는데, 관련 사건으로는 1945년 2월 23일에서 25일 사이에 벌어진 [[치치시마섬 식인 사건]]이 있다. 이 사건은 사기 진작 차원에서 현지 지휘관이었던 [[다치바나 요시오]]가 직접 나서 식인을 했는데 이는 공문서로도 남아있다. 일본군의 식인 행위들을 일부의 일탈로서 극소수의 사례로 보는 견해나 아예 부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당대 일본군의 식인 행위는 꽤나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심지어 같은 [[일본군]]마저도 잡아먹을 지경이었다. 아래는 이에 대한 여러 증언들이다. > '''[[일본군]]은 포로들을 선별하여 매일 1명씩 죽인 후 먹었다.''' 나는 직접 그 광경을 봤는데, 일본군은 그곳에서 100여명의 포로를 먹었다. 나머지 포로들은 약 80km 떨어진 다른 장소로 데려가 그 곳에서 10명의 포로들이 병사하였다. 거기서 일본군은''' 또 다시 포로들을 선별하여 먹기 시작했고, 선택된 포로를 오두막으로 데려가 산 채로 살을 몸에서 도려내었다.''' 그 후 나머지 몸을 구덩이에 버렸고 포로는 구덩이 안에서 죽어갔다. >----- >[[인도인]] 포로인 랜스 나익 하탐알리의 증언 > 산에서 퇴각하는 [[일본군]]의 대부분은 약탈자였습니다. 먹을 게 전혀 없었어요. '''그래서 우리는 제비뽑기를 하기로 했어요. 진 사람을 죽여서 잡아먹기로 한 거죠.''' 그러나 진 사람이 도망치기 시작해서 우리는 그를 쏘았어요. 그는 결국 잡아먹혔어요. 당신은 아마도 우리들 중 다수가 현지 여자들을 [[강간]]했다고 생각할 겁니다.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굶주림을 채워줄 대상으로 생각되었어요. 우리는 [[성욕]]이 없었어요. 강간을 하는데는 힘이 너무 많이 듭니다. 우리가 꿈꾼 것은 먹을 것뿐이었습니다. '''나는 사람의 팔과 다리를 가져가는 군인들을 산에서 만났습니다.''' 우리가 두려워한 것은 게릴라가 아니라 일본 군인들이었습니다. >----- >[[일본 해군]] 헌병 대장 노기 하루미치 회고록 > 우리 부대는 시체를 빼내기 위해 파견되었는데, 희생자의 소지품으로 보이는 3세트의 [[호주군]] 웹장비, 부츠 2켤레, 옷 2벌, 다른 잡동사니를 발견했다. 추가 수색으로 00에 의해 00의 것으로 쉽게 인지되는 두피를 찾아냈다. '''창자는 통나무에 걸쳐져 있고, 불에 탄 살 조각, 탄약갑에는 간으로 보이는 조각들이 있었다.''' 300야드 정도 떨어진 오두막 밖에서 불에 탄 뼈가 발견되었다. 100야드쯤 떨어진 다른 오두막 밖에서 '''다리, 허벅지, 어깨뼈 등이 사람 살덩어리와 함께 발견되었다.''' 또 다른 오두막 밖에는 00의 머리가 있었다. 두피를 벗긴 머리와 등뼈로만 구성된 그 시체는 바닥에 놓여 있었다. 이 잔해 옆에는 타서 숯이 된 손목과 손이 놓여 있었다. >----- >― A.B.카슨 중위 > [[일본군]]과 대만인은 따로 식사를 준비했다. 일본군은 고기를 개고기라 주장했다 그는 섬에서 개를 본 적이 거의 없던지라, 매일 개고기를 공급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. PW[* 이니셜.]가 본 고기는 껍질이나 털이 거의 없었다. 그가 아는 개고기는 껍질이 두텁고 털자국이 빽빽하게 나 있는 것이었다. 그는 사람 고기는 구워서 먹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. 1944년 6월 PW와 다른 13명의 대만인이 연합군에 투항하러 가는데, 신원을 알 수 없는 약 100명의 일본군이 이들을 가로막았다. 대만인 8명이 죽었는데, 그가 죽은 척 하고 있는 동안 PW는 일본군이 '''죽은 대만인에게서 빼낸 창자를 자기 음식 그릇에 넣는 것을 보았다.''' 일본군은 곧 떠났다. >----- >107 비행장 측량 및 건설부대 2중대, 대만인 노동자 PW, JA는 1944년 8/28 보로키에서 미군에 투항. [[미국]]에서는 [[일본군]]의 [[식인]]을 고발한 책이 나왔다. 책의 제목은 이다.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추락한 [[미군]]의 조종사들을 일본군이 살해하여 먹었다는 내용이다. 주로 간과 허벅지 살을 먹었다고 하며 군의관이 해부를 했다고.[[http://gall.dcinside.com/worldwar2/9632|#]] 사건이 벌어진 곳은 오가사와라 제도의 '[[일본군#s-9.4|치치시마]]'라는 섬이다.[* 이 때 잡힌 미군 조종사들 중 유일한 생존자가 [[조지 H. W. 부시]]였다. 바다를 표류하다 미군 잠수함이 구조.] [[아버지의 깃발]]로 유명한 제임스 브래들리도 이와 관련한 책을 낸 적이 있다. 제목은 <플라이 보이스>.[[http://www.amazon.com/Sorties-into-Hell-Hidden-Chichi/dp/0275980812 Sorties into Hell: The Hidden War on Chichi Jima, http://book.naver.com/bookdb/book_detail.nhn?bid=1516421|관련서적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